제가 아는 장로님께서 섬기시는 미래나눔재단의 글을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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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나눔재단 장학생으로 성실하게 잘 정착하고 있는 학생이 연세소식지 2012년 11월호에 "절망에서 희망으로" 라는 글을 썼다. 광일아 사랑하고 열렬히 박수를 보낸다.
- 목숨을 건 두 번의 탈북,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
글 : 김광일 학생(신학과 09학번)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것은 논리적 구호가 아니다.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삶의 구호다. 절망의 사전적 정의를 보면, 바라볼 것이 없게 되어 모든 희망을 끊어 버린 상태이다. 이처럼 절망은 논리적으로 희망과 반대 방향을 달리고 있지만, 희망이 중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논리적인 영역은 재끼고 경험적인 영역인 삶을 통해 ‘절망/희망’의 역동적 의미를 알 수 있다. 아니, 느낄 수 있다. 혹시 어딘가에서 절망에 빠져 혼자서 힘들어 하는 학우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혹시 절망에 빠져있는가? 만일 그렇다면 기뻐하라고! 이제 당신은 그러한 절망의 틈 사이에서 희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갑자기 왠 뚱딴지같은 소리냐고? 그 뚱딴지같은 소리가 당신의 삶을 바꿀 것을 기대하며 소소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려 한다. 희망과 절망의 살을 비비며 맞닿아 있는 복잡다단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나는 북한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늘 가난과 싸워야 했다. 90년대 중반에 들면서 북한의 경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어부였던 아버지는 일을 그만두고 어머니와 함께 타지로 식량 구입을 다니기 시작하였다. 자연스레 나는 하나뿐인 여동생을 돌보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책가방 대신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배낭을 메고 하루 종일 여동생과 산을 헤매거나 남의 집 마당에 심은 감자나 콩을 훔쳐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던 어느 날 멀리 식량을 구하러 가신 부모님은 아무리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았다. 빚쟁이들의 괴롭힘과 경제 변화로 척박해진 인심은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살아가기 버거운 환경이었다. 그래서 여동생과 함께 고향을 떠나 중국 접경지역인 함경북도 회령으로 도망갔다. 그때 내 나이 열 살, 여동생은 여덟 살이었다. 사실 배고픔이나 추위는 참을 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헤어진 것이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다. 여동생은 어린나이에 부모와 이별하면서 받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렸고, 의지할 곳이 없어서인지 오빠인 나에게 심한 집착 증세를 보였다. 심지어 화장실 갈 때에도 따라 나와서 혹시 오빠가 도망갈까 감시를 했다. 난 당시 열 살도 안 된 나이에 동생을 돌봐야 할 책임감으로 어깨가 무거웠다.
어촌에서 살다 온 우리 남매에게 회령은 황량한 벌판 같았고 우리는 내던져진 숨 가쁜 물고기 같았다. 추운 겨울날 장마당(시장)에는 우리와 같은 신세의 꽃제비들이 절망과 어둠 가운데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리저리 방황했다. 그러한 곳에서도 나는 버텨내기가 너무 버거웠기에 산에서 초막을 짓고 밤에는 몇 시간을 걸어서 마을로 내려가 농작물을 훔쳤다. 그리고 새벽이 되도록 혼자 산에서 기다릴 동생을 생각하며 산을 넘고, 화차(화물기관차)를 타고 석탄이나 식량을 훔쳐 뛰어내리기를 반복하며 삶을 살아갔다. 그렇게 치열하게 삶을 살아갈 때, 옆에서 함께 자다가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보며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음을 깨달았다. 서문에서 절망과 희망이 맞닿아 있다고 말했듯이! 절망의 늪은 나에게 희망으로 가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어린나이에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렇게 동생과 함께 여러 번 탈북을 시도하였다. 하지만 어린나이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래서 지금까지 후회하고 있는 선택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여동생을 두고 혼자 탈북하게 된 것이다. 두만강을 건너던 날 나는 여동생과 기약 없는 약속을 했다. “00아, 삼일만 죽지 말고 기다려, 오빠 중국 가서 돈이랑 먹을 거 가지고 올게, 응?”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생은 울면서 말했다. “오빠 제발 가지마! 나 아빠, 엄마 없어도 되고, 우리끼리 그냥 굶어도 좋아. 다시 배고프다고 울지 않을게. 그러니까 제발 혼자 가지마! 나 혼자 오빠 없이 어떻게 살아?” 나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단호하게 거절하고 두만강으로 향했다. 동생은 울면서 나를 두만강까지 몰래 쫓아왔다. 동생이 쫓아오는 것을 알았지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 뒤를 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울고 있는 동생을 그냥 두고 가자니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래서 두만강 건너기 전에 나무 뒤에 숨어 있는 동생에게로 가서 삼일만 살아있어 달라고 다시 한 번 부탁하고 차가운 두만강으로 뛰어들었다.
그렇게 중국으로 정신없이 넘어갔다. 그리고 간 곳이 바로 중국에 있는 ‘교회’였다. 북한에서 교회는 사람의 피를 뽑아 팔아먹는 곳이라고 배웠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곳은 참 따뜻한 곳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다보니 나는 이미 동생과 약속한 날을 훌쩍 넘겨버렸다. 하지만 목숨 걸고 넘어온 보상이라도 받듯이 너무나도 편안한 현실에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행복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얼마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울고 있는 동생을 버리고 온 죄책감 때문이었다. 밥을 먹을 때나 어떠한 일을 할 때도 보고 싶은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고, 매일 밤 이불 속에서 절박한 심정으로 동생의 이름을 부르며 이불을 적시었다. 이때 인간의 육체적 만족을 통한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바라던 삶이고 늘 꿈꿨던 풍요로움을 맞이하고도 행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러던 중에 처음으로 꿈과 희망을 품게 되었다. 왜냐하면 북한에서 느끼지 못한 따뜻한 사랑을 교회에서 느꼈기 때문이다.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와 원망을 가지고 있던 내가 하나님을 만나면서 그분의 사랑과 어루만짐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고, 비로소 내가 왜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지 느끼게 되었다. 북한에서의 나는 늘 먹을 것을 줍기 위해 땅만 보고 다니던 어부의 아들이었지만, 이제 하늘에 소망을 두고 절망과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을 낚는 베드로와 같은 어부가 되었다. 그곳에서 6년의 양육과 훈련을 통해 나는 나라와 민족, 그리고 고향에 남겨진 가족을 위해 내가 준비 돼야 하는 것을 알고 꿈을 키워갔다.
자유를 위해 한국행을 결심했을 때, 많은 기도와 준비를 했다. 하지만 내 바람대로 모든 일이 되지는 않았다. 함께 훈련 받던 탈북자 13명 중 3명만 성공하고 나를 포함해 10명은 제3국 라오스에서 잡혀 다시 북송되었다. 하나님이 원망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냐고, 지켜준다더니 이게 뭐냐고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한참을 원망하고 기력이 쇄할 때 그분의 음성이 들려왔다. 바람과 함께 불어오는 그분의 세밀한 음성을 난 들을 수 있었다. “나의 가는 길은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그래, 어차피 내 목숨은 이미 죽었던 목숨이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지켜주셨으니, 앞으로의 나의 삶을 받아달라고 다시 기도했다. 그렇게 나는 북송되어 감옥에서 모진 고통과 역경을 견뎌냈다.
생사를 가늠하기 어려운 극한의 상황에 몰리면 인간은 가면을 벗는다. 인간이라는 동물은 이성이라는 것을 내팽개치고 오로지 생존을 위해서만 몸부림친다. 감옥에서의 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다. 더군다나 함께 탈옥을 시도했다가 실패하며 참혹한 몰골로 주검이 된 동료들도 보았다. 그러한 상황에서는 나 역시 이기적인 동물성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는 나와 함께 하셨다. 그분은 차가운 쇠창살 안에서도 나와 함께 계셨다. 그로인해 나는 모진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고 진정한 신앙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러던 중에 성경을 몰래 가지고 있던 감옥 소장을 만났고, 청진에서 활동하다 잡혀온 지하교회 교인들도 만났다. 그리고 가장 기뻤던 것은 잃어버린 동생을 다시 찾았다는 것이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결과는 꿈에서라도 이뤄지기 원했던 여동생과의 상봉이었고, 무사히 함께 대한민국으로 왔다. 그러면서 나는 북한에 대한 마음을 더욱 깊이 새길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북한을 위해 준비하신다고! 그리고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짊어지신다고!
어떤 사람들은 묻는다. 힘들지 않았느냐고. 그래, 힘들었다. 하지만 난 자랑스럽다. 두 번의 탈북과 함께 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랄까? 만일 첫 탈북에 성공했다면, 분명 한국에 와서 절망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나님은 늘 나와 함께 하셨다. 중국으로 탈북, 기독교 사상교육 6년, 한국망명 이 삼중(三重)죄를 짓고도 북한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희망과 꿈을 품고 다시 한국에 올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우리의 삶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이다. 지금 마주한 어려움은 누구의 것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절망의 문틈 사이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절망에 매몰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 문틈 사이에서 희망을 보는 사람은 세상을 바꿀 수 있다. 난 꿈꾸고 있다. 고향땅의 통한과 억울함의 소리를 대신 울려주는 스피커와 같은 역할을 하겠다고! 통일된 후에도 그동안 쌓인 그들의 마음속 소리를 들어주고 상처를 회복시켜주는 ‘상처 입은 치유자(Wounded healer)’가 되겠다고!